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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요하네스버그, 이런 저런 이야기 :: 2010/08/15 06:31
1. 7월 초부터 머물고 있는 요하네스버그는 서울이나 워싱턴에서 누리던 움직임의 자유가 없는 곳이다. 대중 교통이 마땅치 않을 뿐더러 택시는 어마어마하게 비싸고, 한국인 여자애 혼자 돌아다니기도 안전치 않은지라, 어두워지면 반드시 실내에 들어와 있어야 한다. 실내라고 해야 움직일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책상, 침대, 옷장이 있는 아주 단순한 방 한 칸. 방랑벽 수준으로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터라 처음 한 달은 너무 괴로워서 해가 나 있을 동안에는 무슨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밖에 나가 있다가 해가 질 쯤에서야 꾸역꾸역 집으로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이것도 점점 익숙해져 이제는 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방에 TV가 있는 것도, 인터넷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라서 논문을 읽거나 워드를 띄워놓고 레포트나 잡글을 끄적이거나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많이 쓰고 많이 읽는 기회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운동을 덜 하게 되는 문제는 있지만, 사실 정신적으로는 심심할 틈이 없다. 밖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는 노하우도 익혀가고 있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덕에 오히려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오바 좀 보태면, 왜 감옥이나 오지에서 주옥같은 글들이 나오는지 왠지 알 것만 같은 이 기분? 안타깝다 이 상황에 헤밍웨이나 신영복님쯤 데려다 놓으면 세계명작하나 나오는건데 말이지!
2. 다행스럽게도 이곳에서 하고 있는 공부는 재미있다.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깊이 배워보고 다른 시각의 이야기를 들어 볼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리고 있다. 만나는 사람들도 좋고, 수업들도 흥미롭고, 같은 수업을 듣는 이 곳 친구들도 성실하고 눈빛이 반짝반짝하다. 평생 들여다보고 싶은 주제가 무엇인지 조금씩 알 것도 같은데, 평생 들여다보는 그 일을 하고 싶은지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 앉아서 글 읽고 글 쓰고 하는 것이 몸에 잘 맞는 걸 보면 체질인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사람 만나는 게 제일 좋지만, 공부하고 싶은 주제가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고 얘기 듣고 해야만 하는 분야이니 뭐 두루두루 나쁘지 않지 싶기도 하다. 글을 읽고 쓰면서 재미있다, 의미있다, 궁금하다, 와 이사람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저렇게 써보면 어떨까, 같은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은 내가 이 순간을 완전히 살아가고 있다고 느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과 보내는 시간, 아주 잘 만든 영화에 푹 빠져있는 시간, 좋아하는 운동을 하며 땀 흘리는 시간,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시간처럼.
3. 한 가지 절실하게 아쉬운 것은 어디 가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사람 구경도 하고 책도 읽으며 늘어져 있을 수 있는 공간. 커피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뭐 한잔 시켜놓고 퍼져서 공부할 분위기는 전혀 아니고, 사람 구경은 하기 보다는 당하게 되는 듯 한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학교에는 백 명에 한 명 꼴은 동양계 학생이 있지만 학교 밖 숙소 근처의 지역에선 동양인은 전혀, 그야말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명동마냥 복잡하고 바글바글한 길거리에서 사람에 치이고 혼자 눈에 띄이다 보면 어디 앉아서 공간을 즐기기는 커녕 시선 없는 곳으로 가서 쉬고 싶어진다. 치안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하도 듣다 보니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온 몸에 신경이 곤두서있는 느낌이 들 때도 종종 있다. 캠퍼스는 괜찮지만, 캠퍼스를 조금만 벗어나도 도시적이고 묘한 긴장감이랄까 불안정함이랄까 하는 것들이 공기중에 떠다니는 것이 살갗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런 기분으로 걸어다니는 느낌. 무신경하게 슬렁슬렁 다니는 체질인 나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다. 겨울에 돌아가면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 아침 일찍부터 가서 저녁까지 잡지니 소설책 같은 읽을거리나 뒤적이면서 하루 종일 퍼져 있을테다!
4.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면서, 혹은 항상 사람과 어떤 형태로든 어울리고 맞대고 있던 한국에서의 대학생활 이후로, 더 이르게는 가족과 떨어져 대학 생활을 하게 된 어느 시점부터, 점점 혼자 있는 공간이나 혼자 보내는 시간에 적응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처음 가족과 떨어져 있을 때는 그게 무척 괴로웠는데, 이제는 며칠에 한 번 정도 엄마와 전화통화하는 것이 당연하고 덤덤하다. 대학 다닐 때에는 혼자 밥 먹으면 큰일나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하던 일 잠깐 멈추고 점심시간 10분, 15분 혼자 간단히 챙겨먹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스터디 그룹에 속해야 공부가 더 잘 되고 도서관이나 공부방에 가서 친구들과 나란히 공부해야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방에 앉아서 혼자 논문도 읽고 쓰고 하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느껴진다. 변하는 환경에 적응해 가는 것일까, 혼자서도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혼자인게 익숙해 지는 걸까. 무엇이 되었든 관성처럼 혼자가 편하고 좋은 사람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불편하고 부대끼고 피곤해도 같이 사는 삶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으면, 이런 환경에서는 오로지 나만 알고 내 이야기만 하는 괴물이 되어 버리기가 너무 쉽다.
5. 그런데 요하네스버그의 삶처럼, 그게 어려운 환경이라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조금 허술해지면 이용당하고, 부대끼면 위험하고, 불편해하면 누군가의 눈에 띄어버리는 그런 환경. 길거리에서 눈이 마주친 이에게 웃으며 인사했더니 몇 블락이고 따라오며 전화번호를 요구한다거나, 잠이 덜 깬 상테에서 비몽사몽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아저씨가 '이 나라에서는 타는 사람이 인사하는데 어디서 온 애가 버르장머리 없게 버튼만 누르고 있냐'며 호통을 친다거나, 사고가 난 것 처럼 보여 사정을 물었더니 이래 저래 계속 돈을 요구한다거나, 매번 지나치는 빌딩 경호원에게 인사하고 잘 지내자고 했더니 밤중에 일하다 피곤하니 자겠다고 방에 갑자기 들어온다거나. 어디까지가 문화적으로 또는 타인에게 적응해야 하는 문제이고 어디까지가 내 한계이고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하는 문제인지 끊임없이 헷갈리고, 그래서 많이 지치는 것은 사실이다. 도시에 만연한 안전의 부재는 타인에 대한 경계와 의심과 피로를 부르고, 경계하고 의심하다가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전에 금이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사람 사는 일이니, 변명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보고,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원망하거나 비관하지 않기로 다짐한다.
6. 요하네서버그에서 느낀 바, 갇히지 않고서는 성숙할 수 없고, 부딪히지 않고서는 자랄 수 없다. 이 곳에서의 생활은 편하지도 쉽지도 않지만, 성숙하고 자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임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