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렛] 국제허세학도가되지않기위해스스로에게쓰는반성문. :: 2009/10/25 05:05

대학원 첫 학기, 국제관계 이론 및 정책 수업을 듣고 있는데, 사실 듣고있다기 보다는 '불평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 같다. Pofessional school의 특성상 이론적 논의가 아닌 이론의 실용성/적용 가능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굉장히 현실적이고 흥미로울 듯 하지만 왠지 그렇지 못하다. 딴에는, 불평하는 이유가 있다. 프로그램 OT의 역할을 하는(cornerstone) 수업인지라 백 명 넘는 학생들을 앉혀놓고 진행하는, 그래서 상호작용이 거의 없는 수업이라는 것이 큰 부분이다. (학부도 아니고 대학원에서 이게 무슨일이람!!) 게다가, 뼛속까지 물렁한 혹은 삐딱한 내게는'안보' '현실주의'에 집중된 커리큘럼이 그다지 즐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딩의 팔할이 안보 연구로 유명한 MIT Press 아니면 Internatioal Security지에 실린 논문들일 정도인데, 비판이론류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사실 별 '실용성'이 없기 떄문이기도 하고, 담당교수님이 매우 저명한 안보전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업 이름이 '안보이론' 정도였음 좋았을텐데, '국제정치이론수업'이라는 매우 misleading한 이름을 달고 있고 게다가 무조건 들어야 하는 필수과목이다. (어딜 가든 '전공필수과목'이 재밌기는 어렵다...)

그리하야, 불평하면서도 꾸역꾸역 리딩을 해 가고, 수업시간에 옆에 앉은 동기와 낙서로 수다를 떨지언정 수업에 꼬박꼬박 출석하기는 하지만, 수요일 저녁 5가 별로 기다려지는 시간은 아니다. 이런 성향의 수업이 아니고서는 스스로는 결코 찾아읽지 않았을 주제의 흥미로운 아티클들을 접하는 것은 좋지만(국제법판례나 NGO보고서도 아니고, 내가 혼자 공부하겠답시고 핵저지니 전략적 무기종류 설명하는 글 따위를 읽을 가능성 따위는 없다...), 수업 자체에서는 가슴 뛰는 신선한 논리도, 지적 자극도 느끼기 어려웠다. 학부에서도 국제정치를 전공한 탓에, 음악/경제/언어학 등 다양한 전공을 다진 동기들에 비해 수업에서 다루는 여러 논의들과 개념들에 비교적 익숙한 편인 나는 'anarchy' 'institution'이니 'democratic peace' offensive/defensive realism'이니 하는 기본 개념들을 다시 설명하고 정의하는 수업이 지루했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그런데 그 느낌들이 얼마나 '근거없는 자만심'이었는가를 느끼게 해 준 일이 있었다.

지난 주에, 중간고사 문제가 나왔다. Take-home essay 였는데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
여러분이 속한 에이전시에서 미국이 미래에 직면하게 될 강대국의 위협을 국제관계이론의 입장에서 조명하는 짧은 보고서를 국무부 외교관에게 제출하려 한다. 그 외교관은 국제관계이론에 대한 아주 대략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현 상황에서 이론이 과연 어떤 쓸모가 있을지 알고 싶어 한다. 인용구나 참고문헌, citation 전혀 없이 본인의 글과 표현으로 다음 내용에 대하여 1600자 내외의 보고서를 작성하라: 국제정치의 주요 이론 중 3가지를 선택해 그 입장을 정리한 후, 미국이 직면하게 될 강대국의 위협을 평가하기 위하여 주의를 기울여 관찰해야 할 요소들이 무엇인지, 왜 그 요소들을 보아야 하는지, 그리고 이에 대해 각 이론이 어떤 면에서 서로 동의하지 않고 왜 그러한지 밝혀라.]

문제지를 딱 받아들고 처음 든 생각은, 에이 뭐 그냥 BS좀 하면 되겠네. 이런 모호하고 광범위한 문제는 뭐람 꼼꼼하게 리딩 할 필요도 없는 거였구나 허무한듸....였다. 그리고 몇 시간 정도 저 문제를 머릿속으로 굴리다가(다시 말해 아직 아무것도 안 쓰다가) 저녁에 캐롤린의 생일파티에 갔다. Iranian American인 캐롤린의 추천으로 시내의 유명한 레바논 음식점에 갔는데, 생일 축하 해주러 사람들이 바글바글 20명도 넘게 모였다. 그 중 최근 일을 시작한 NGO에서 만난, 왠지 큰오빠 같은 존재인 라시타를 근 몇주만에 다시 보았다. 그와 안부를 주고 받다가, 주말에 뭐할거냐고 묻기에 내가 "내일은 종일 저런 모호하고 막 낸 것 같은 말도 안되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해야되! 말이 되? 그 많은 내용을 1600자로 정리하라는게? 1600자는 고사하고 1600장은 쓸 수 있겠다!"라고 열을 내며 불평을 터뜨렸다. 그리고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갑자기, '그래서 그 3가지 이론이 뭔데?' 라고 진짜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다. 나는 '음 일종의 스펙트럼이 있는데 뭐 분류야 하기 나름이니, neorealism, neoinstitutionalism, constructivism 이렇게 쓸까 싶네...' 라고 하자 그가 곧 정색하며 'constructivism? 이름 맘에든다. 그게 뭔지 설명해줘' 란다. 스리랑카와 미국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고, DC에서 소위 '문제아반'을 맡아서 가르치는 선생님 일을 곧 시작하는 이 친구는 '그게 뭔지 설명해줘' 식의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다. (....-_)

그런데 도저히, 완전히 경청할 준비를 하고 눈을 빛내며 앉아있는 이 친구에게 구성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아듣게 설명할 길을 모르겠는 거다. ,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되냐 구성주의가 뭐냐니. 이걸 외교과 동기도 아니고 엘리엇 동기도 아닌 이 똑똑하지만 국제관계의 ㄱ도 안배운 친구에게 어떻게 설명하냐....orz.

어찌되었든 이래저래 돌려 대강 설명해 주고는 '에이 이런거 말고 재밌는 얘기 하자'며 화제를 샤샤샥 바꾸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웃고 떠들고 엄청난 양의 맛난 레바논 음식들을 먹으며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시작한 다음날, 종일 앉아서 월트도 월츠도 저비스도 코헤인도 웬트도 미어샤이머도 아무도 인용하지 않고 순 내 말로 주요 이론들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데.......................아아아악 정말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주요 개념의 정의는 대가나 내리는거야, 라고 도망치는 건, 이미 '난 이런 개념들 익숙해'라고 까불던 내게는 지나치게 비겁한 일인 것이었다 그런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 자르듯 정의 내릴 수 있는 간단한 개념들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수업시간에 또 듣는게 그렇게 지루하고 시시하게 느껴지던 그 개념들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지극히 추상적인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기 때문에, 정답도 없고 검증된 길도 없고 변수만 수백만개인 공부를 하기 때문에,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이 명확하지 않고 사실과 믿음이 구분되지 않는 공부이기 때문에, 너무 쉽게 지적 허영에 빠졌던 것 같다. 내가 불평하며 쌓아왔던 것은 지적 갈증이 아니라 지적 허세에 불과했던 거다. 누구 말마따나 아무 단어에다가'국제' 붙이면 그럴싸해 보이는 이 묘한 효과는 학생에게는 치명적 독이다. 아는 척 하는 것이 너무 쉽다. 아인슈타인의 말을 다시 새긴다. "If you can't explain it to your grandma, you don't know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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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원 | 2009/10/31 00:42 | PERMALINK | EDIT/DEL | REPLY

    If you can't explain it to your grandma, you don't know it. 진짜 동감이다!!!
    예전에 우리과 교수님이 이야기하더라고.
    비전공자에게 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을 설명한다고 생각하고 공부하라고.
    '이건 너무 당연해서 그냥 넘어가도 된다고 생각했던것'들이 의외로 내가 정확히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어물쩡 넘어간 것들이 진짜 많더라.

    그게 자극이 되서 항상 공부할때 너의 친구처럼 '매우 똑똑하지만 그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인' 사람에게 설명을 할 수 있도록 공부하려고 하는데...

    문제는 그게 시간이 너무 오래걸린다는거. ㅋㅋㅋ

    • | 2009/11/12 00:48 | PERMALINK | EDIT/DEL

      응, 시간도 오래걸리고 힘들고 결국 자기와의 싸움... 힘내자!
      그나저나, 자, 이제 Heisenberg Uncertainty Principle을 설명해줘! :D ㅎㅎㅎ

  • R | 2009/11/01 21:27 | PERMALINK | EDIT/DEL | REPLY

    동감동감.;
    초큼 다른 경우이지만 나도 회사에서 후배를 가르칠때 호텔전공도 아니고 처음 일하는 사람에게는 설명할때는 시간이 꽤 오래걸리더라고-_- 설명하면서 나도 같이 다시 예약을 배우는 기분이랄까.;;

    • | 2009/11/12 00:46 | PERMALINK | EDIT/DEL

      가장 효율적인 학습방법은 '남에게 가르쳐보는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는데 과외했던것 생각해보면 정말 맞는 말. 오오오 그나저나 '후배에게 예약에 대해 설명해주는 호텔리어 R양' 이라니 뭔가 멋진데!! +_+

  • H | 2009/11/03 16:40 | PERMALINK | EDIT/DEL | REPLY

    나에게 이런 난감함을 느끼게 해 줬던 교수를 떠올리게 해 주는구나 숙제 이름이 cocktail napkin이었는데, 어느 밤 펍에서 갑자기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대답해 줘야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옆에 있는 칵테일 냅킨을 뽑아서 그 위에 끄적거리면서 이해를 도울 수는 있으나 학문적 용어를 하나도 쓰지 않으면서 그 사람에게 경제학 개념을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는 취지를 담은 이름이었어. 문제 자체가 시험 문제라면 나의 'intuition 비스무리한 것'이 답으로 바로 통했을 거 같았는데, 정작 종이 한 장에 끄적끄적 설명하려니까 '기회 비용' 개념에서 바로 막혀서 현상 설명 자체로 넘어가지도 못하고 끙끙댄 기억... 망치 없이 못을 박는 것 같은 그 막막하고 급하게 아쉬운 기분... 그리고 과연 내가 뭘 배운 것인가에 대한 자괴감까지 ㅎㅎ

    그 깨달음 잊지도 놓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완전 던져놓았더니 이렇게 다시 돌아와서 나를 때리누나 ㅠ ㅠ

    • | 2009/11/12 00:47 | PERMALINK | EDIT/DEL

      와 좋은 숙제네. 맞아, 우선 '감' 혹은 'intuition'을 잡고, 그다음 그 감을 '정제'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아. 그 '정제'의 과정에서 jargon이 아닌 평이한 언어를 사용하는게 정말 어려운 일. 그나저나 비교적 intuitive한 학문인 것 같은 경제학도 이러니, 양자역학처럼 상식에 역행하는 내용 공부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고민스러울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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